1

 이태 전 겨울, 서대문에 있는 다락방에서 베다니 학원이 열리고 있을 때였다. 나는 연사의 초청을 받고 그 자리에 잠석한 일이 있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대개가 목사의 부인되는 분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강연을 하면서도 이상한 착각에 속으로 갸웃거렸다.

 

 여러 청중 속에 대여섯 사람쯤은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어디서 꼭 만난 사람들 같은데, 거기가 어디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주관하던 법회였든지, 아니면 출가 이전에 같은 동네에 살던 분들이었든지. 어디서 본 얼굴들 같은데 도무지 기억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문득 그 얼굴들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 얼굴들은 실제로 어디서 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내면적인 신앙 생활의 밖으로 번져 나옴으로 해서, 기왕에 알았던 사람들로 착각을 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어쩌면 전행에 이웃에서 살던 사촌들이었는지도 모르긴 하지만.

 

 사람끼리 친근해질 수 있다는 것은 밖에 드러난 거죽에서보다도 투명한 영혼에 의해서임을 알 수 있었다. 이때의 인연으로 우리는 뒷날 또 만나게 된다. 한 번 만난 사람들은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이다.

 

 지난해 가을 나는 운수행각으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어느 날 해질녘 속리산에 들르게 되었다. 객실에 행장을 푼 뒤 개울가에 나가 먼지를 털고 오는데,

 

 ":법정 스님 아니세요?"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돌아보니 그때 베다니에서 만난 어머니들이었다. 뜻 아닌 데서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언젠가 붉은 줄을 그어가며 읽던 막스 밀러의 글이 생각났다.

 

 " · · · · · ·사방이 어두워 졌을 때, 마음 속 깊이 혼자임을 느꼈을 때, 그리고 사람들이 좌로 우로 지나가면서도 서로가 누구인지 모를 때에, 잊었던 감정이 우리 가슴 속에서 용솟음쳐 오르게 된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것은 사랑도 아니고 우정은 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저를 모르셔요?' 하고 묻고 싶어진다. 그러한 때에 인간과 인간의 사이는 형제의 사이보다도, 부자지간보다도, 친구지간보다도 더 가깝게 느껴진다."

 

 이때 타인은 결코 무연한 존재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나의 분신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가 아무 말도 없이 스쳐 지나가고 만다.

 

2

  대개의 경우 어떤 종교를 통해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종교를 갖지 않은 일반인들에 비해 대인 관계에 있어서 너그럽다고 한다. 그러나 그 대인 관계가 이교도로 향하게 될 때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수가 더러 있다. 너그러웠던 아량이 갑자기 움츠러들어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돋우는 것이다.

 

 나는 가끔 이런 대접을 받는다. 물건을 사기 위해 가게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가게 주인은 정확한 발음으로,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한다. 물론 얻으러 온 탁발승으로 오인하고 한 말일 것이다. 태연하게 물건을 골라 돈을 치르고 나오면서 돌아보면 복잡한 표정이다. 혹은 기독교인들끼리 산사에 놀러와 어쩌다 찬송가라도 부를라치면 기를 쓰고 제지하는 산승들이 또한 없지 않다.

 

 이와 같은 씁쓸한 현상은 어디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일까. 자기가 믿고 있는 종교적인 신념에서라기보다, 이교도라면 무조건 적대시하려 드는 배타적인 감정에 이유가 있을것이다. 자기가 믿는 종교만이 유일한 것이고 그밖에 다른 종교는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미신으로 착각하고 있는 맹목에서일 것이다. 이렇듯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선민의식이 마치 자기의 신심을 두텁게 하는 일인 양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시야를 가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단견短見들이 읽는 경전이나 성경의 해석 또한 지극히 위태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글이나 말 뒤에 들어 있는 뜻을 망각하고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 표면적인 언어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종교가 존재하고 있는 한 어떤 종교이든지 그 나름의 독자적인 상징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상징이 맹목적인 숭배물로 되거나 혹은 다른 종교에 대해 우월을 증명하는 도구로 쓰인다면 그것은 무의미하다.

 

 모든 오해는 이해 이전의 상태이다. 따라서 올바른 비판은 올바른 인식을 통해서만 내려질 수 있다. 그런데 그릇된 고정 관념에 사로잡힌 일부 종교인들은 성급하게되 인식을 거치지 않고 비판부터 하려 든다. 물론 인식이 없는 비판이란 건전한 비판일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들이 진정으로 자기 종교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저절로 타종교의 본질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전까지 기독교도와 불교도 사이에 바람직한 대화의 길이 트이지 못한 그 원인을 찾는다면, 상호간에 독선적인 아집으로 인한 오해에 있었을 것이다. 출세간적出世間的인 사랑은 편애가 아니고 보편적인 것이다. 보편적인 사랑은 이교도를 포함한 모든 이웃에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즐겨 읽는 <요한의 첫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는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부처님'으로 바꿔 놓으면 사이비 불교도들에게 해당될 적절한 말씀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볼 때가 있다. 오늘날 만약 예수님과 부처님이 자리를 같이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릇된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으르렁대는 사이비 신자들과는 그 촌수가 다를 것이다.

 

 모르긴 해도 의기가 상통한 그들은 구태여 입을 벌려 수인사를 나눌 것도 없이 서로가 잔잔한 미소로써 대할 것만 같다. 그들의 시야는 영원에 닿아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하나로 맺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3

 모든 오해는 저마다 자기 집에만 갇혀 있는 데서 오게 마련이다. 굳게 닫았던 문을 열고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서로가 형제임을 마음 속으로부터 느끼게 된다. 최근에 종교인들끼리의 모임이 활발해지면서부터는 종래 편견에 사로잡힌 이해 이전의 상태가 많이 해소되고 있다. 

 

 무엇보다 만나서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사실이 소중하다. 만나지 않고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또한 이야기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만나게 된다. 만남은 일종의 개안開眼일 수 있다. 왜냐하면 만나 이야기함으로써 오해의 장막이 걷히고 인식의 지평이 열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영역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저마다 외롭게 떠 있는 섬이 아니라, 같은 대지에 맺어져 있는 불가분의 존재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리그 베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하나의 진리를 가지고 현자들은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

 

 여러 종교를 두고 생각할 때 음미할 만한 말씀이다. 사실 진리는 하나인데 그 표현을 달리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가끔 성경을 읽으면서 느끼는 일이지만, 불교의 대장경을 읽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수가 있다. 조금도 낯설거나 이질감을 느낄 수 없다. 또한 기독교인이 빈 마음으로 대장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문제는 그릇된 고정 관념 때문에 '빈 마음'의 상태에 이르지 못한 데서 이해가 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표현을 빌리면, 종교란 가지가 무성한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 가지로 보면 그 수가 많지만, 줄기로 보면 단 하나뿐이다. 똑같은 히말라야를 가지고 동쪽에서 보면 이렇고, 서쪽에서 보면 저렇고 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하나에 이르는 개별적인 길이다. 같은 목적에 이르는 길이라면 따로따로 길을 간다고 해서 조금도 허물될 것은 없다. 사실 종교는 인간의 수만큼 많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저마다 특유한 사고와 취미와 행동 양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안목으로 기독교와 불교를 볼 때 털끝만치도 이질감이 생길 것 같지 않다. 기독교나 불교가 발상된 그 시대와 사회적인 배경으로 인해서 종교적인 형태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질의 것이다. 종교는 인간이 보다 지혜롭고 자비스럽게 살기 위해 사람이 만들어 놓은 하나의 '길'이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만큼 서로 사랑하느냐에 의해서 이해의 농도는 달라질 것이다. 진정한 이해는 사랑에서 비롯된다.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라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요한의 첫째 편지 4장 12절)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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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을 읽어 줄 네가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슬기롭고 아름다운 소녀이기를 바라면서 글을 쓴다. 슬기롭다는 것은, 그리고 아름답다는 것은 그 사실만 가지고도 커다란 보람이기 때문이다.

 

 일전에 사람을 만나기 위해 종로에 있는 제과점에 들른 일이 있다. 그런데 그애들이 깔깔거리며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는 슬퍼지려고 했다.

 

 그 까닭은, 고1이나 2쯤 되는 소녀들의 대화치고는 너무 거칠고 야한 때문이었다. 우리말고도 곁에는 다른 손님들이 꽤 있었는데 그애들은 전혀 이웃을 가리지 않고 마구 떠들어대더구나. 그리고 말씨들이 어찌도 거친지 그대로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말씨는 곧 그 사람의 인품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또한 그 말씨에 의해서 인품을 닦아갈 수도 있는 거야. 그러기 때문에 일상 생활에 주고받는 우리들의 인격 형성에 꽤 큰 몫을 차지한다. 그런데 아름다운 소녀들의 입에서 거칠고 야비한 말이 거침없이 튀어나올 때 어떻게 되겠니? 꽃가지를 스쳐오는 바람결처럼 향기롭고 아름다운 말만 써도 다 못하고 죽을 우리인데.

 

 언젠가 버스 종점에서 여차장들끼리 주고받는 욕지거리로 시작되는 말을 듣고 나는 하도 불쾌해서 그 차에서 내리고 말았다. 고물차에서 풍기는 기름 냄새는 골치만 아프면 그만이지만, 욕지거리는 듣는 마음 속까지 상하게 한다. 그것은 인간의 대화가 아니라 시궁창에서 썩고 있는 추악한 악취나 다름없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 잠시라도 나를 빠지게 할 수가 없었다.

 

 욕지거리가 인간의 대화로 통용되고 있는 요즘 세상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배우지 못했거나 생활 환경이 무질서한 그런 애들과는 달라야 한다.

 

 '아름답다는 것은 그 사실만으로도 큰 보람'이란 말을 앞에서 했다. 그럼 아름다움이란 뭘까. 밖에서 문지르고 발라 그럴듯하게 치장해 놓은 게 아름다움은 물론 아니다. 그건 눈속임이지. 그건 이내 지워지고 만다. 아름다움이 영원한 기쁨이라면 그건 결코 일시적인 겉치레일 수 없어. 두고 볼수록 새롭게 피어나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하나의 발견일 수 도 있어. 투명한 눈에만 비치기 때문이다.

 

나는 미스 코리아라든지 미스 유니버스 따위를 아름다움으로 신용할 수 없어. 그들에게는 잡지의 표지나 사진관 앞에 걸린 사진처럼 혼이 없기 때문이야. 아름다움을 정치처럼 다수결로 결정한다는 것은 정말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아름다움을 드러내기보다는 모독하고 있는 거야. 아름다움이란 겉치레가 아니기 때문이다. 상품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아름다움이라면 거죽만을 보려는 맹점이 있어. 그래서 아름답게 보이려고 갖은 수고를 다한다. 값진 화장품을 써야 하고, 사람이 먹기도 어려운 우유에 목욕을 하는가 하면 무슨무슨 운동을 하고, 값비싼 옷을 해 입어야 하고· · · · · ·.

 

 그들은 모르고 있어. 감추는 데서 오히려 나타난다는 예술의 비법을. 현대인들은 그저 나타나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감추는 일을 망각하고 있어. 겉치레에만 정신을 파느라고 속을 다스릴 줄 모른단 말야. 이런 점은 우리 춘향이나 심청이한테 배워야 할 거다.

 

 그런데 아름다움은 누구에게 보이기 전에 스스로 나타나는 법이거든. 꽃에서 향기가 저절로 번져 나오듯.

 

 어떤 시인의 말인데, 꽃과 새와 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정결한 기쁨을 우리에게 베풀어 준다는 거야. 그러나 그 꽃은 누굴 위해 핀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기쁨과 생명의 힘으로 피어난 것이래. 숲속의 새들도 자기의 자유스런 마음에서 지저귀고 밤하늘의 별들도 스스로 뿜어지는 자기 빛을 우리 마음에 던질 뿐이란 거야. 그들은 우리 인간을 위한 활동으로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 안에 이미 잉태된 큰 힘의 뜻을 받들어 넘치는 기쁨 속에 피고 지저귀고 빛나는 것이래.

 

 이와 같이 아름다움은 안에서 번져 나오는 거다. 맑고 투명한 얼이 안에서 밖으로 번져 나와야 한단 말이다. 사람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어째서 그럴까. 서로 뒤바뀌지 않게 알아볼 수 있도록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그렇게 빚어 놓은 것일까? 아닐 거야,. 아니고 말고.그건 저마다 하는 짓이 달라서 그런 거지. 

 

 얼굴이란 말의 근원이 얼의 꼴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한 사람의 얼굴 모습은 곧 그 사람의 영혼의 모습일 거다. 아름다운 얼굴은 지금까지 아름다운 행위를 통해 아릅답게 얼을 가꾸어와서 그럴 거고, 추한 얼굴은 추한 행위만을 쌓아 왔기 때문에 그럴 거야. 그렇다면 아름답고 추한 것은 나 아닌 누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게 아니라, 내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그러한 꼴(탈)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이, 욕지거리를 잘하는 미인을 상상할 수 있겠어? 그건 결코 미인이 아니야. 그리고 속이 빈 미인을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기 때문에 아름다움은 또한 슬기로움과 서로 이어저야 한다. 슬기로움은 우연하게 얻어지는 게 아니거든. 순수한 집중을 통해 자기 안에 지닌 빛이 발하는 거지.

 

 나는 네가 시험 점수나 가지고 벌벌 떠는 그런 소녀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물론 골빈당이 되어서도 안 된다. 네가 있음으로 해서 네 이웃이 환해지고 향기로워질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 소녀라는 말은 순결만이 아니라, 아름답고 슬기로운 본질을 가꾸는 인생의 앳된 시절을 뜻한다.

 

 너의 하루하루가 너를 형성한다. 그리고 머지 않아 한 가정을, 지붕 밑의 온도를 형성할 것이다. 또한 그 온도는 이웃으로 번져 한 사회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너의 '있음'은 절대적인 것이다. 없어도 그만인 그런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누이야, 이 살벌하고 어두운 세상에 너의 그 청정한 아름다움으로 인해서 살아갈 만한 세상이 되도록 부디 슬기로워지거라. 네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라. 그것이 곧 너 자신일 거다.(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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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며칠 사이에 뜰에는 초록빛 물감이 수런수런 번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가을 이래 자취를 감추었던 빛깔이 다시 번지고 있다. 마른 땅에서 새 움이 트는 걸 보면 정말 신기하기만 하다. 없는 듯이 자취를 거두었다가 어느새 제철을 알아보고 물감을 푸는 것이다.

 

 어제는 건너 마을 양계장에서 계분을 사다가 우리 다래헌茶來軒 둘레의 화목에 묻어 주었다. 역겨운 거름 냄새가 뿌리를 거쳐 줄기와 가지와 꽃망울에 이르면 달디단 5월의 향기로 변할 것이다. 대지의 조화와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새봅의 흙 냄새를 맡으면 생명의 환희 같은 것이 가슴 가득 부풀어 오른다. 맨발로 밟는 밭흙의 촉감, 그것은 영원한 모성이다.

 

 거름을 묻으려고 흙을 파다가 문득 살아남은 자임을 의식한다. 나는 아직 묻히지 않고 살아 남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겨울 춘천을 다녀오면서도 그런 걸 느꼈었다. 그때 어쩌다 맨 뒷자리 비상구 쪽이 배당받은 내 자리였다. 그 동네도 초만원인 망우리 묘지 앞을 지나오면서 문득 나는 아직도 살아남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굳이 비상 창구를 통해서 본 묘지가 아니더라도 지금 생존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실로 '살아남은 자들'임에 틀림없다. 눈 한번 잘못 팔다가는 달리는 차바퀴에 남은 목숨을 바쳐야 하는 우리 처지다. 방 임자도 몰라보는 저 비정한 연탄의 독기와 장판지 한 장을 사이해 공존하고 있는 일상의 우리가 아닌가. 그 이름도 많은 질병, 대량 학살의 전쟁, 불의의 재난,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갈등. 이런 틈바구니에서 우리들은 정말 용하게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이다.

 

 죽음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은 영원한 이별이기에 앞서, 단 하나뿐인 목숨을 여의는 일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그 자체가 존귀한 목적이다. 따라서 생명을 수단으로 다룰 때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악이다. 그 어떠한 대의 명분에서일지라도 전쟁이 용서 못할 악인 것은 하나뿐인 목숨을 서로가 아무런 가책도 없이 마구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사람들끼리는 더욱 아끼고 보살펴야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자기 차레를 맞이할지 모를 인생이 아닌가. 살아남은 자인 우리는 채 못 살고 가 버린 이웃들의 몫까지도 대신 살아 주어야 한다. 나의 현 존재가 남은 자로서의 구실을 하고 있느냐가 항시 조명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날 일을 마치고 저마다 지붕 밑의 온도를 찾아 돌아가는 밤의 귀로에서 사람들의 피곤한 눈매와 마주친다.

 

 "오늘 하루도 우리들은 용하게 살아 남았군요." 하고 인사를 나누고 싶다. 살아남은 자가 영하의 추위에도 죽지 않고 살아 남은 화목에 거름을 묻어 준다. 우리는 모두가 똑같이 살아남은 자들이다.(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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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개를 아느냐고 할 때 "오, 그사람? 잘 알고 말고. 나하곤 막역한 사이지. 거 학창시절엔 그렇고 그런 친군데· · · · · ·." 하면서 자기만큼 그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는 듯이 으시대는 사람이 간혹 있다.

 

 그러나 남을 이해한다는 것처럼 어려운 것이 또 있을까. 다양하고 미묘한 심층을 지닌 인간을 어떻게 다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인간은 저마다 혼자다. 설사 칫솔을 같이 쓸 만큼 허물없는 사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국 타인이다.

 

 아무개를 안다고 할 때 우리는 그의 나타난 일부밖에 모르고 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데서 우리는 불쑥 그와 마주칠 때가 있다. 길가에 무심히 피어 있는 이름 모를 풀꽃이 때로는 우리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듯이.

 

 나는 적연 선사寂然先師를 생전에 뵌 일이 없다. 내가 입산하기 전에 선사는 이미 사바 세계에서 인연을 거둔 뒤였기 때문이다. 시은施恩을 가볍게 하기 위해 항상 누더기를 걸치고 생식을 했다는 선사, 하루 세 시간밖에 잠을 안 자고 참선만을 했다는, 그리고 평생토록 산문 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는 그가 어떤 분인지 남들이 전하는 말만 듣고서는 도무지 그 모습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 스님이 생전에 머무르던 암자에 갔을 때였다. 거기서 나는 뜻밖에도 선사와 마주쳤던 것이다. 한 문도門徒가 간직하고 있는 유물을 보고 문득 선사의 걸걸한 음성을 들을수 있었다. 서글서글한 눈매며 늘씬한 허우대까지도 역력히 보았던 것이다. 이렇듯 선사와 상면相面하게 된 계기는 줄이 다 해진 거문고와 손때가 밴 퉁소에서였다. 

 

 그때까지 나는 선사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기없는 고목처럼 꼬장꼬장한 수도승, 인간적인 탄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카랑카랑한 목소리, 일에 당해서는 전혀 타협을 모르고 고집불통이었으리라고. 그런데 암자 한구석에 세워 둔 거문고와 그 위에 걸린 퉁소를 보고 그의 인간적인 여백과 마주쳤던 것이다.

 

 암자 곁 커다란 반석에 앉아 땀을 들이고 있었다. 솔바람 소리를 타고 상상의 날개가 펼쳐졌다. 청명한 달밤, 선사는 거문고로 안고 나와 선열禪悅을 탄다. 걸걸한 목청으로 회심의 가락을 뽑는다. 반석 위에 뽀르르 다람쥐가 올라온다. 물든 일이 시나브로 진다. 

 

 그는 찬바람이 감도는 율사律師가 아니었을 것이다. 경전의 구절이나 좌선에만 집착하는 시시콜콜한 도승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날의 상면으로 인해 나는 생전에 일면식도 없던 선사에게서 훈훈한 친화력 같은 걸 느끼게 되었다. 물론 내 나름으로 알고 있는 그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와 그렇게 마주쳤던 것이다.(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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