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말이 참 많은 시대다. 먹고 뱉어 내는 것이 입의 기능이긴 하지만, 오늘의 입은 불필요한 말들을 뱉어 내느라고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수고를 하고 있다. 이전에는 사람끼리 마주보며 말을 나누었는데, 전자매체가 나오면서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지껄일 수 있게 되었다.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는 유언비어나 긴급조치에 위배만 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다스리는 사람들의 비위에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그 말의 내용이 아침이건 거짓이건 혹은 협박이건 욕지거리건간에 마음대로 지껄일 수 있다. 가위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풍토이다.

그런데 말이 많으면 쓸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이 우리들의 경험이다. 하루하루 나 자신의 입에서 토해지는 말을 홀로 있는 시간에 달아 보면 대부분 하잘것없는 소음이다. 사람이 해야 할 말이란 꼭 필요한 말이거나 '참말' 이어야 할 텐데 불필요한 말과 거짓말이 태반인 것을 보면 우울하다. 시시한 말을 하고 나면 내 안에 있는 빛이 조금씩 새어 나가는 것 같아 말끝이 늘 허전해진다.

좋은 친구란 무엇으로 알아볼 수 있을까를 가끔 생각해 보는데, 첫째 같이 있는 시간에 대한 의식으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같이 있는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면 아닐 것이고, 벌써 이렇게 됐어? 할 정도로 같이 있는 시간이 빨리 흐른다면 그는 정다운 사이다. 왜냐하면 좋은 친구하고는 시간과 공간 밖에서 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기도를 올려 보면 더욱 잘 알 수 있다. 기도가 순일하게 잘될 경우는 시공時空 안에서 살고 있는 일상의 우리이지만 분명히 시공 밖에 있게 되고, 그렇지 못 할 때는 자꾸 시간을 의식하게 된다. 시간과 공간을 의식하게 되면 그건 허울뿐인 기도다.

우리는 또 무엇으로 친구를 알아볼 수 있을까. 그렇다. 말이 없어도 지루하거나 따분하지 않은 그런 사이는 좋은 친구일것이다. 입 별려 소리내지 않더라도 넉넉하고 정결한 뜰을 서로가 넘나들 수 있다. 소리를 입 밖에 내지 않을 뿐, 구슬처럼 영롱한 말이 침묵 속에서 끊임없이 오고 간다. 그런 경지에는 시간과 공간이 미칠 수 없다.

말이란 늘 오해를 동반하게 된다. 똑같은 개념을 지닌 말을 가지고도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것은 서로가 말 뒤에 숨은 뜻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들이 아가의 서투른 말을 이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말소리보다 뜻에 귀기울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랑은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

사실 침묵을 배경 삼지 않는 말은 소음이나 다를 게 없다. 생각없이 불쑥불쑥 함부로 내뱉는 말을 주워 보면 우리는 말과 소음의 한계를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의 입에서 토해지는 말씨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꾸만 거칠고 천박하고 야비해저 가는 현상은 그만큼 내면이 헐벗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안으로 침묵의 조명을 받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급한 현대인들은 자기 언어를 쓸 줄 모른다. 정치권력자들이, 탤런트들이, 가수가, 코미디언이 토해낸 말을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대로 주워서 흉내내고 있다. 그래서 골이 비어 간다. 자기 사유마저 빼앗기고 있다.

수도자들에게 과묵이나 침묵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것도 바로 그 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안에 고여 있는 말씀을 비로소 듣는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미처 편집되지 않은 성서다. 우리들이 성서를 읽는 본질적인 의미는 아직 활자화되어 있지 않은 그 말씀까지도 능히 알아듣고 그와 같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我有一卷經(아유일권경)
  不因紙墨成(불인지묵성)
  展開無一字(전개무일자)
  常放大光明(상방대광명)
  사람마다 한 권의 경전이 있는데
  그것은 종이나 활자로 된 게 아니다
  펼쳐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네.

불경에 있는 말이다. 일상의우리들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으로써만 어떤 사물을 인식하려고 한다. 그러나 실체는 저 침묵처럼 보이지도 들리지도 잡히지도 않는 데에 있다. 자기 중심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허심탄회한 그 마음에서 큰 광명이 발해진다는 말이다.

참선을 하는 선원에서는 선실 안팎에 '묵언默言' 이라고 쓴 표지가 붙어 있다. 말을 말자는 것. 말을 하게 되면 서로가 정진에 방해되기 때문이다. 집단 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는 시와 비를 가리는 일이 있다. 시비를 따지다 보면 집중을 할 수 없다. 선은 순수한 집중인 동시에 철저한 자기 응시이다. 모든 시비와 분별망상을 떠나서만 삼매三昧의 경지에 들 수 있다.

말은 의사소통의 구실을 하지만 때로는 불필요한 잡음의 역기능도 하고 있다. 구시화문口是禍門. 입을 가리켜 재앙의 문이라고 한 것도 그 역기능적인 면을 지적한 것이다. 어떤 선승들은 3년이고 10년이고 계속해서 묵언을 지키고 있다. 그가 묵언 중일 때는 대중에서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수도자들이 이와 같이 침묵하는 것은 침묵 그 자체에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다. 침묵이라는 여과 과정을 거쳐 오로지 '참말' 만을 하기 위해서다. 침묵의 조명을 통해서 당당한 말을 하기 위해서다. 벙어리와 묵언자의 다른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칼릴 지브란은 우리들이 해야 할 말을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귓속의 귀에" 하는 말이라고 했다. 사실 언어의 극치는 말보다도 침묵에 있다. 너무 감격스러울 때 우리는 말을 잃는다. 그러나 사람인 우리는 할말은 해야 한다.

그런데 마땅히 입 벌려 말을 해야 할 경우에도 침묵만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미덕이 아니라 비겁한 회피다. 그와 같은 침묵은 때로 범죄의 성질을 띤다. 옳고 그름을 가려 보여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비겁한 침묵이다. 비겁한 침묵이 우리 시대를 얼룩지게 한다.

침묵의 의미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대신 당당하고 참된 말을 하기 위해서이지, 비겁한 침묵을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디에도 거리낄 게 없는 사람만이 당당한 말을 할 수 있다. 당당한 말이 흩어진 인간을 결합시키고 밝은 통로를 뚫을 수 있다. 수도자가 침묵을 익히는 그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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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사는 사람들이 산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다면, 속모르는 남들은 웃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산승들은 누구보다도 산으로 내닫는 진한 향수를 지닌다. 이 산에 살면서 지나온 저 산을 그리거나 말만 듣고 아직 가 보지 못한 그 산을 생각한다.

사전에서는 산을 '육지의 표면이 주위의 땅보다 훨씬 높이 솟은 부분' 이라고 풀이한다. 이러한 산의 개념을 보고 우리는 미소를 짓는다. 그것은 형식논리학의 답안지에나 씀직한 표정이 없는 추상적인 산이기 때문이다.

산에는 높이 솟은 봉우리만이 아니라 깊은 골짜기도 있다. 나무와 바위와 시냇물과 온갖 새들이며 짐승, 안개, 구름, 바람, 산울림 그리고 퇴락해 가는 고사古寺, 이밖에도 무수한 것들이 우리들의 상념과 한데 어울려 하나의 산을 이루고 있다.

산이 좋아 산에서 산다는 말이 있지만 그건 거짓이 아니다. 산이 싫어지면 산에서 살 수가 없다. 그러니 한번 산에 들어 살게 되면 그 산을 선뜻 떠나올 수 없는 애착이 생긴다.

산은 사철을 두고 늘 새롭다. 그 중에도 여름이 지나간 가을철 산은 영원한 머시마인 위들을 설레게 한다. 물든 잎이, 머루와 다래와 으름이 숲에서 손짓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일과가 끝나는 가을날 오후에는 선원禪院이고 강원講院이고 절 안이 텅 빈다. 다들 숲에 들어가 산짐승처럼 덩굴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우수수 꿀밤이 떨어진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뭐라 지껄이는 소리들이 귀에 익은 음성처럼 그토록 정답게 들려올 수가 없다. 이런 일들로 해서 산에서 사는 사람들한테서는 풋풋한 산 냄새가 난다.

예전 수도승들은 살던 산이 단조로워지면 도반들 곁을 떠나 더욱 깊은 산을 찾아 홀로 나섰다. 벼랑 아래 삼간 초막을 짓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도심道心을 닦았다.


힌구름 무더기 속에 삼간 초막 있어
앉고 눕고 거닐기에 저절로 한가롭다.
차가운 시냇물은 반야般若를 노래하고
맑은 바람 달과 어울려 온몸에 차다.
'

이런 경지는 고려 말 나옹 선사뿐 아니라 산을 알고 도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출세간出世間의 풍류다. 깊은 산이라 온종일 사람 그림자 끊이고 홀로 초막에 앉아 만사를 쉬어 버린 것이다. 서너 자 높이의 사립을 반쯤 밀어 닫아 두고, 고단하면 자고 주리면 먹으면서 시름없이 지내는 것은 단순한 은둔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다. 시절 인연이 오면 사자후獅子吼를 토하기 위한 침묵의 수업이다.

숲과 새들이 있고 감로천甘露泉이며 언못이 있는 우리 다래헌茶來軒이지만 무더운 여름날이면 문득문득 산 생각이 난다. 그때마다 시냇물 소리를 그리워하며 속으로 앓는다. 훌쩍 찾아갈 산이 없어 날개가 접히고 만다. 요즘의 산사에서는 그 풋풋한 산 냄새를 맡을 수가 없다. 관광 한국의 깃발 아래 그 그윽한 분위기가 사라져가고 있다.
이래서 뜻있는 수도승들은 명산 대찰名山大刹을 등지고 이름없는 산야에 묻힌다. 도시의 공해로 인해 새들이 어디론가 사라져가듯이.

안타까운 일이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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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는 속담이 있다. 사람의 마음처럼 불가사의한 것이 또 있을까. 너그러울때는 온 세상을 두루 받아들이다가도,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는 것이 우리 마음이다. 그래서 가수들은 오늘도 "내 마음 나도 몰라......" 라고 우리 마음을 대변한다. 자기 마음을 자신이 모른다니, 무책임한 소리 같다. 하지만, 이것은 평범하면서도 틀림이 없는 진리다.

사람들은 일터에서 많은 사람들을 대하게 된다. 어떤 사람과는 눈길만 마주쳐도 그날의 보람을 느끼게 되고, 어떤 사람은 그림자만 보아도 밥맛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한정된 직장에서 대인관계처럼 중요한 몫은 없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정든 직장을 그만두게 될 경우, 그 원인 중에 얼마쯤은 바로 이 대인 관계에 있지 않을까 싶다.

어째서 똑같은 사람인데 어느 놈은 곱고 어느 놈은 미울까. 종교적인 측면에서 보면 전생에 얽힌 사연들이 조명되어야 하겠지만, 상식의 세계에서 보더라도 무언가 그럴 만한 꼬투리가 있을 것이다. 원인없는 결과란 없는 법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직장이 '외나무 다리' 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선 같은 일터에서 만나게 된 인연에 감사를 느껴야 한다. 이 세상에는 삼십 몇 억이나 되는 엄청난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 중에서도 동양, 또 그 속에서도 5천만이 넘는 한반도, 다시 분단된 남쪽, 서울만 하더라도 6백만이 넘은 사람들 가운데서 같은 직장에 몸담아 있다는 것은 정말 아슬아슬한 비율이다. 이런 내력을 생각할 때 우선 만났다는 인연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꼬운 일이 있더라도 내 마음을 내 스스로가 돌이킬 수 밖에 없다. 남을 미워하면 저쪽이 미워지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미워진다. 아니꼬운 생각이나 미운 생각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그 피해자는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간다면 내 인생 자체가 얼룩지고 만다.

그러기 때문에 대인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인생을 배우고 나 자신을 닦는다. 회심回心, 즉 마음을 돌이키는 일로써 내 인생의 의미를 심화시켜야 한다.

맺힌 것은 언젠가 풀지 않으면 안 된다. 금생에 풀리지 않으면 그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직장은 그 좋은 기회일 뿐 아니라 친화력을 기르는 터전일 수 있다. 일의 위대성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점일 것이다. 일을 통해서 우리는 맺어질 수 있다. 미워하는 것도 내 마음이고, 고와하는 것도 내 마음에 달린 것이다. <화엄경>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한 것도 바로 이 뜻이다.

그 어떤 수도나 수양이라 할지라도 이 마음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마음이 모든 일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법구경>에는 이런 비유가 있다.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점점 그 쇠를 먹는다."

이와 같이 그 마음씨가 그늘지면 그 사람 자신이 녹슬고 만다는 뜻이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려면, 내 마음을 내가 쓸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고 일상적인 대인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왜 우리가 서로 증오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같은 방향으로 항해하는 나그네들 아닌가.(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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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생각의 실마리는 흔히 버스 안에서 이루어진다. 출퇴근 시간의 붐비는 시내 버스 안에서 나는 삶의 밀도 같은 것을 실감한다. 선실禪室이나 나무 그늘에서 하는 사색은 한적하긴 하지만 어떤 고정관념에 갇혀 공허하거나 무기력해지기 쉬운데 달리는 버스 안에서는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종점을 향해 계속해서 달리고 있는 버스는 그 안에 실려 가는 우리들에게 인생의 의미를 적잖게 부여하고 있다. 산다는 일이 일종의 연소요, 자기 소모라는 표현에 공감이 간다. 그리고 함께 타고 가는 사람들의 그 선량한 눈매들이, 저마다 무슨 생각에 잠겨 무심히 창밖을 내다보는, 그래서 조금은 외롭게 보이는 그 눈매들이 나 자신을 맑게 비추고 있다. 그 눈매들은 연대감을 갖게 한다. 이 시대와 사회에서 기쁨과 아픔을 함께 하고 있다는 그러한 연대감을 갖게 한다.

나는 얼마 전부터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택시를 타지 않는다. 탈 줄을 몰라서가 아니라 타고 싶지가 않아서다. 주머니 실력도 실력이지만, 제멋대로 우쭐대는 물가의 그 콧대에 내 나름으로 저항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이유는 택시 안에서는 연대감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다. 돈을 더 내면 편하고 신속하게 나를 운반해 주겠지만, 그때마다 이웃과의 단절을 번번이 느끼게 된다. 붐비는 차 속에서 더러는 구둣발에 밟히기도 하고 옷고름이 타지는 수도 있지만 그런 데서 도리어 생명의 활기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어 견딜 만하다.

그리고 버스를 타면 운전사와 승객 사이의 관계를 통해 새삼스레 공동 운명체 같은 것을 헤아리게 된다. 그가 딴전을 부린다거나 운전을 위태롭게 한다면 그로 인한 피해는 우리 모두의 것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기술과 노고를 인정하면서도 차를 제대로 몰고 가는지, 당초의 약속대로 노선을 지키면서 가는지에도 무관심할 수 없다. 머리 위에서 고래고래 뿜어대는 유행가와 우습지도 않은 만담이 우리를 몹시 피곤하게 하지만 운전사가 좋아하는 것일 테니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

끝없는 인내는 다스림을 받는 우리 소시민들의 차지이니까.

2
사람을 흙으로 빚었다는 종교적인 신화는 여러 가지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고대 인도인들도 우리들 신체의 구성 요소로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을 들고 있는데, 쇠붙이나 플라스틱을 쓰지 않고 흙으로 만들었다는 데는 그만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대지는 영원한 모성, 흙에서 음식물을 길러내고 그 위에다 집을 짓는다. 그 위를 직립 보행하면서 살다가 마침내는 그 흙에 누워 삭아지고 마는 것이 우리들 인생의 생태다. 그리고 흙은 우리들 생명의 젖줄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씨앗을 뿌리면 움이 트고 잎과 가지가 펼쳐져 거기 꽃과 열매가 맺힌다. 생명의 발아 현상을 통해 불가시적인 영역에도 눈을 뜨게 한다.

그러기 때문에 흙을 가까이하면 자연 흙의 덕을 배워 순박하고 겸허해지며, 믿고 기다릴 줄을 안다. 흙에는 거짓이 없고, 추월과 무질서도 없다.

시멘트와 철근과 아스팔트에서는 생명이 움틀 수 없다. 비가 내리는 자연의 소리마저 거부한다. 그러나 흙은 비를, 그 소리를 받아들인다. 흙에 내리는 듣고 있으면 우리들 마음은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정결해지고 평온해진다. 어디 그뿐인가, 구두와 양말을 벗어 버리고 일구어 놓은 밭흙을 맨발로 감촉해 보라. 그리고 흙냄새를 맡아 보라. 그것은 약동하는 생의 기쁨이 될 것이다.

그런데 잘살겠다는 구실 아래 산업화와 도시화로 치닫고 있는 오늘의 문명은 자꾸만 흙을 멀리하려는 데 모순이 있다. 생명의 원천인 대지를 멀리하면서, 곡식을 만들어 내는 어진 농사꾼을 짓밟으면서 어떻게 잘 살 수 있을 것인가. 산다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느냐에 의해 삶의 양상은 여러 가치로 달라질 것이다.

요즘의 식량난은 심상치 않은 일 같다. 그것이 세계적인 현상이고, 그 전망은 결코 밝을 수 없다고들 한다. 그 까닭을 늘어나는 인구에다만 돌려 버릴 성질의 것은 아니가.

흙을 더럽히고 멀리한 과보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흙으로 빚어진 인간에게 인간의 실상이 무엇인가를 경고하는 소식은 아닐까. 어쩌면 다행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눈먼 인류에게, 흙을 저버린 우리들에게 흙의 은혜를 거듭 인식케 할 계기가 된다면.

3
현대인들은 이전 사람들에 비해서 아는 것이 참 많다. 자기 전공 분야가 아니라도 신문, 잡지와 송 등의 대량 매체를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똑똑하고 영리하기만 하다. 이해와 타산에 민감하고 겉과 속이 같지 않다. 매사에 약삭빠를 뿐 아니라 성급하고 참을성이 모자라는 현대인들에게서 끈기나 저력 혹은 신의 같은 것은 아예 기대할 수 없다. 물결에 씻긴 조약돌처럼 닳아질 대로 닳아져 매끈거린다.

혜월 선사慧月禪師는 절 곁에 논을 쳤다. 쓸모없이 버려진 땅을 보고 논을 만들었으면 싶었다. 때마침 흉년이 들어 동구 사람들이 살기가 어렵게 된 것을 보고 그들을 불러다 일을 시킨다. 한 달 두 달이 걸려도 논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 보는 사람마다 그 노임으로 더 많은 논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만류하지만 끝내 굽히지 않는다. 마침내 그를 미친 노장이라고 비웃게 된다.

선사는 못 들은 체 날이 새면 일터에 나가 일꾼들과 어울려 일을 한다. 이와 같이 해서 몇 백 평의 논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거기에 든 노임은 이루어진 논의 시세보다 몇 곱 더 들어갔다. 그러나 선사는 없던 논이 새로 생긴 것을 기뻐했다.

그는 세속적인 눈으로 볼 때 문명히 산술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어리석음으로 해서 흉년에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사연이 깃들인 논이므로 절에서는 그 논을 단순한 땅마지기로서가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사풍寺風의 상징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한결같이 약고 닳아빠진 세상이기 때문에 그토록 어리석고 우직스런 일이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 준다. 대우大愚는 대지大智에 통한다는 말이 켤코 빈말은 아닐 것이다.

4
어떤 종파를 가릴 것 없이, 오늘날 종교가 종교 본래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요인은 한 마디로 말하기 어렵도록 복합성을 띠고 있다.

지나간 성인들의 가르침은 하나같이 간단하고 명료했다. 들으면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학자(이 안에는 물론 신학자도 포함되어야 한다)라는 사람들이 튀어나와 불필요한 접속사와 수식어로써 말의 갈래를 쪼개고 나누어 명료한 진리를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자기 자신의 문제는 묻어 둔 채, 이미 뱉어 버린 말의 찌꺼기를 가지고 시시콜콜하게 뒤적거리며 이러쿵저러쿵 따지려 든다. 생동하던 언행은 이렇게 해서 지식의 울 안에 갇히고 만다.

이와 같은 학문이나 지식을 나는 신용하고 싶지 않다. 현대인들은 자기 행동은 없이 남의 흉내만을 내면서 살려는 데에 맹점이 있다. 사색이 따르지 않는지식을, 행동이 없는 지식인을 어디에다 쓸 것인가. 아무리 바닥이 드러난 세상이기로, 진리를 사랑하고 실현해야 할 지식인들까지 곡학아세曲學阿世와 비겁한 침묵으로써 처신하려 드니, 그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배반이다.

얼마만큼 많이 알고 있느냐는 것은 대단한 일이 못 된다. 아는 것을 어떻게 살리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인간의 탈을 쓴 인형은 많아도 인간다운 인간이 적은 현실 앞에서 지식인이 할일은 무엇일까. 먼저 무기력하고 나약하기만 한 그 인형의 집에서 나오지 않고서는 어떠한 사명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무학無學이란 말이 있다. 전혀 배움이 없거나 배우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학문에 대한 무용론도 아니다. 많이 배웠으면서도 배운 자취가 없는 것을 가리킴이다. 학문이나 지식을 코에 걸지 않고 지식 과잉에서 오는 관념성을 경계한 뜻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지식이나 정보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롭고 발랄한 삶이 소중하다는 말이다. 여러 가지 지식에서 추출된 진리에 대한 신념이 일상화되지 않고서는 지식 본래의 기능을 다할 수 없다. 지식이 인격과 단절될 때 그 지식인은 사이비로 위선자가 되고 만다.

책임을 질 줄 아는 것은 인간뿐이다. 이 시대의 실상을 모른체하려는 무관심은 비겁한 회피요, 일종의 범죄다. 사랑한다는 것은 함께 나누어 짊어진다는 뜻이다. 우리에게는 우리 이웃의 기쁨과 아픔에 대해 나누어 가질 책임이 있다. 우리는 인형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인간이다. 우리는 끌려가는 짐승이 아니라 신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야 할 인간이다.(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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