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이 말은 근대화에서 소외된 촌락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입에 담을 수 있는 오늘의 속담이다. 우리 동네에는 뚝섬으로 가는 나루터 까지의 길도 그러한 유형에 속하는 이른바 개발 도상의 길이다.
이 길은 몇 해 전만 해도 산모퉁이며 논길과 밭둑길이 있어 사뭇 시골길의 정취가 배어 있었다. 그런데 무슨 지구 개발인가 하는 바람에 산이 깎이고 논밭이 깔아뭉개지더니 그만 허허벌판이 되고 말았다. 물 빠질 길도 터놓지 않아 비가 오거나 눈이 녹으면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다. 그래도 이 길을 다니는 선량한 백성들은 당국에 대한 불평 한 마디 없이 묵묵히 오고 간다.
이제 이 길에 얼음이 풀리니 장화를 신고도 발을 떼어 놓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길에도 감사를 느끼면서 걷기로 했다. 그것은 한동안 잃어 버렸던 흙과 평면 공간을 이 길에서 되찾았기 때문이다.
몇 사람이 합숙을 하면서 해야 할 일이 있어 어느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 한 달 남짓 지냈었다. 같이 일할 사람들이 절에서는 거처가 불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처음에는 생활 환경이 바뀌는 데서 오는 약간의 호기심과 아파트의 주거 생태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라 싶어 그런 대로 지낼 만했다. 생활이 편리해서 우선 시간이 절약되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일에 능률도 안 오르고 무엇인가 퇴화되어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8층에서 단추만 누르면 삽시간에 지상으로 내려온다. 슬리퍼를 신은 채 스무 걸음쯤 걸어 슈퍼마켓에서 필요한 것을 사온다. 그것도 귀찮으면 전화로 불러 가져오게 한다. 물론 연탄 불을 갈 시간 같은 것에 신경을 쓸 필요도 없다. 이렇듯 편리하게 사는 데도 뭔가 중심이 잡히지 않은 채 겉돌아 가는 것 같았다.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흙탕길을 걸으면서 문득 생각이 피어올랐다. 잘산다는 것은 결코 편리하게 사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우선 우리는 보행의 반경을 잃은 것이었다. 그리고 차단된 시야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몸의 동작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활발한 사고 작용도 따른다. 툭 트인 시야는 무한을 느끼게 한다.
그곳에는 수직 공간은 있어도 평면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이웃과도 온전히 단절되어 있었다.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속의 얼굴들도 서로가 맨숭맨숭한 타인들. 그리고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흙이다. 그렇다. 인간의 영원한 향수 같은 그 흙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늘 추상적으로 살았던 것이다. 마치 온실 속의 식물처럼.
흙과 평면 공간. 이것을 등지고 인간이 어떻게 잘 살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현대 문명의 권속들은 그저 편리한 쪽으로만 치닫고 있다. 그 결과 평면과 흙을 잃어 간다. 불편을 극복해 가면서 사는 데에 건강이 있고 생의 묘미가 있다는 상식에서조차 멀어져 가고 있다. 불편하게는 살 수 있어도 흙과 평면 공간 없이는 정말 못 살겠더라.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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